대법원 2023다269139 판례(23. 12. 7.) - 민법 제536조(동시이행의 항변권), 제2조(신의성실)
A는 실거주를 위해 B로부터 아파트를 구매하고 싶었다. 그리고 B의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던 C 역시 그 시기에 맞춰 집을 비워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잔금 지급일 직전 C가 계약갱신을 요구하여 집을 비우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A는 실거주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잔금일에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B는 계약서상 없는 내용이라며 A가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제한 것이라 주장한다. A는 살 곳도 없는데 세입자를 끼고 있는 아파트를 구매해야 하는가? |
최근 아파트를 이용한 레버리지 투자가 워낙 성행하다 보니 전세사기다 뭐다 해서 참 여러가지 방법으로 계약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건은 사기의 문제는 아니다. 실거주 목적으로 계약을 했는데, 중간에 상황이 변해 실거주를 할 수 없게 돼버렸다. 당연히 계약을 취소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계약에 인류애는 없다. 감정도 없다. 사정은 모르겠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계약서는 신중히 사인해야 한다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도 없는 것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의란 무엇인가?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신의, 사전적 정의로는 곧 믿음이다. 하지만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힘을 가지려면 그것을 뒷받침해 줄 여러 약속들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체육복을 가져오지 않아 옆반 친구에게 이를 빌리고자 한다. 친구는 '너 끝나고 바로 다음 체육 수업이 우리니까 깨끗이 돌려줘.'라며 빌려주었다. 이번에는 다 쓰고나서 친구가 바로 써야하니 그대로 친구에게 돌려주었더니 '세탁해서 줘야지?'라고 주장한다.
전자와 후자는 '깨끗이 돌려준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배경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빌려준 친구에게 세탁을 하고 돌려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넉넉했고, 후자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배경에 대해서는 서로가 이미 알고있고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적어도 후자의 약속관계에서는 '깨끗이'의 의미가 '빨아서 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빌려간 물건을 빌리기 전 초기의 상태로 돌려받고자 하는 것은 임대인의 권리이지만, 그것이 적어도 신뢰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체육복을 빌렸을 때의 상황이 '빨아서 돌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는데도 빌려줄 당시에는 말도 없다가 돌려줄 때 와서는 빨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네?'라며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비난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체육복을 빨아다가 돌려주었다. 하지만 친구는 "지금 내가 다시 보니 이 체육복 상단 5cm, 좌측에서 12cm, 반경 0.5mm 지점의 색깔 상태가 원래는 완전한 하얀색에서 채도 0.3%정도의 오염이 되었네. 다시 원상복구를 해오렴."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친구를 힘으로 응징하더라도 판사는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아무리 차주에게 원상복구의 의무가 있다지만, 그 권리의 주장에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정한 일정한 선이 있으며, 이를 넘지 않으면서 정의로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의이다. 권리의 주장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남용하면 거의 무적의 법이 된다.
민법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②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수학에서 배우는 명제 논리 중 '본 명제가 참이면 대우명제도 언제나 참이다.'는 것이 있다. A는 B이면, B가 아니면 A는 아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면 권리는 행사하지 않은 것이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즉, 어떤 권리를 행사하였는데 그것이 신의칙에 위배된다면, 그 권리는 행사하지 않은 것이어야 하는데 이미 권리를 행사한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권리 남용이다. 권리를 남용하면 신의칙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하므로, 그 행사한 권리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의무의 이행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을 이행하면 신의칙에 위배된다면, 그 의무는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다 보니 신의성실의 원칙을 제약없이 적용하다보면 모든 행동이 신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권리행사를 부정하고 이행할 의무가 없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신의성실의 원칙을 적용할 때에는 정의롭고 정당해야 한다고 판례를 말하고 있다.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그 권리행사를 부정하기 위하여는 상대방에게 신의를 공여하였거나 객관적으로 보아 상대방이 신의를 가짐이 정당한 상태에 이르러야 하고 이와 같은 상대방의 신의에 반하여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정의관념에 비추어 용인될 수 없는 정도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2003다18401)
그리고 신의성실의 원칙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전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불법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응? 신의칙에 위배되면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으니 결국 그 권리의 행사가 불법 아닌가? 판례를 보자
민법상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률관계의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하여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추상적 규범을 말하는 것으로서(2003다18401)
신의성실의 원칙은 '권리의 행사에 신의를 좇으라.'는 굉장히 추상적인 규범을 조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권리의 행사가 신의칙에 어긋난다 생각이 되어 법조문으로 '이 권리는 이렇게 행사하면 안됩니다! 그래도 권리를 주장하면 무시하세요!'라고 규정해 놓았다면, 신의성실의 원칙을 쫓을 필요 없이 그냥 위 조문에 의해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즉, 신의칙을 위배하는 행위가 법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냥 그 법을 적용하면 된다. 신의칙을 위배하는 행위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면, 즉, 불법이라면, 적용할 법이 없지만 신의칙에 위배되니 그 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자는 논리가 그때서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위 사례에 적용된 민법 조항을 살펴보자.
선이행의무자가 그 의무를 이행하는데 곤란해졌다면,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민법
제536조(동시이행의 항변권) ①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은 상대방이 그 채무이행을 제공할 때 까지 자기의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채무가 변제기에 있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먼저 이행하여야 할 경우에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전항 본문과 같다.
여기서 2항의 '선의무이행자인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에 대해 판례는 신의칙에 반하는 경우라 표현하고 있다.
‘선이행의무를 지고 있는 당사자가 상대방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에 자기의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는 경우’란 선이행채무를 지고 있는 당사자가 계약 성립 후 상대방의 신용불안이나 재산상태 악화 등과 같은 사정으로 상대방의 이행을 받을 수 없는 사정변경이 생기고 이로 말미암아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선이행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럼 위 사례에서의 '사정변경'이란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가를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계약을 해석할 때에는 형식적인 문구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고 쌍방당사자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가를 탐구하여야 한다. 계약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계약서의 문언이 계약 해석의 출발점이지만, 당사자들 사이에 계약서의 문언과 다른 내용으로 의사가 합치된 경우 그 의사에 따라 계약이 성립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 원고(A)는 피고(B)의 이 사건 아파트에 대한 현실인도의무보다 먼저 이행할 잔금 지급의무를 부담한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매매계약 체결 당시 주택임대차보호법 제6조의3 제1항 본문에 따른 갱신요구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한 이 사건 아파트의 임차인(C)이 잔금 지급일 직전 갱신요구권을 행사(사정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피고의 현실인도의무의 이행이 곤란할 현저한 사정변경이 생겼다고 볼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당초의 계약 내용에 따른 원고의 선이행의무를 이행하게 하는 것이 공평과 신의칙에 반하게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즉, C의 갱신요구권 행사와 관련해서는 계약서에 적어져 있지 않더라도 C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매매계약이 성립됐다는 신의가 형성됐다는 것이고, C가 결국 갱신요구권을 행사함으로써 계약을 했을 때의 사정이 변경됐다면 이는 애초에 서로 지키기로 한 선을 넘은 것, 즉, 신의를 져버린 것이다는 판결이다.
결국, 이 계약의 신의칙에 반하는 사정변경이 생겼고, 이는 A가 B에게 잔금을 지급해야할 선의무가 있는 상태에서 C의 간접점유의 이전의무가 이행되기 어려워져 당초 약속한 B의 의무를 이행이 곤란한 현저한 사유가 발생했으니, A는 자신의 채무이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그리고 위 내용은 민법 제536조에 따른 행위인 것이지, 사정변경에 대해서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판단하였을지언정 A와 B가 가진 의무의 이행 자체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의무불이행인 것은 아님을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은 '불법'인 경우에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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