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22다302237 판결(23. 9. 27.) - 민법 제562조(사인증여), 제1060조(유언의 요식성)
父는 임종이 다가오자 자신이 쌓아온 부를 자녀 5명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父 소유의 논과 건물을 각각 배분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몇 달 뒤 둘째 아들이 갑자기 유언할 당시 '두 아들에게만 재산을 주겠다'는 父의 육성이 담긴 영상을 가지고 와 형과 본인만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언이 형식을 갖추지 못했으니 당시에 있던 자신과 父의 사인증여라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딸들은 자신이 받았던 재산을 오빠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
父는 죽기 직전 자녀 5명에게 재산을 골고루 남기고자 한 것은 명확했다. 형식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실제 당신께서 한 유언에는 '딸들에게도 2천만원씩 너네들이 지급해 주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 유언이 효력을 갖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당시 父가 생전에 차남에게 '아들에게만 재산을 주겠다.'는 말도 하였고 영상으로도 남아있다. 결국 내용이 명확히 상반되고 있다. 양성평등기본법도 있는 마당에 5명의 자녀가 균등 상속을 받는 것이 당연한 세상의 이치인가? 그렇지 않다. 살아생전 차남 외에 父를 찾아온 자식이 한 명도 없다면 父의 입장에서는 법정상속분도 차남 외 다른 자식에게는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배분 비율의 문제는 그 가족끼리 해결할 문제이니 넘어가더라도 차남이 주장하는 '父와 생전에 맺은 증여계약이 효력을 갖는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말로만 맺었더라도 계약은 계약이다. 그렇다면 계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생기고 이는 계약당사자가 사망하였어도 마찬가지이다. 재산뿐 아니라 '계약당사자'라는 지위도 상속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반된 유언을 남긴 당사자 父는 이제 말이 없다.
유언(遺言)의 무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전언, 특히 마지막에 남긴 최후의 말씀인 유언은 자식된 자의 도리로써 당연히 지켜야 할 굉장히 무거운 말씀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상속 재산의 처분에 관해서는 그 당사자가 사망하였더라도 그 재산권을 헌법상 자유로 보장할 만큼 상속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민법에서의 유언은 그렇지 못하다. 아니 없는 수준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유언은 그냥 효력이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 다만 다툼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보니 딱 5가지의 경우에만 유언으로 인정한다. 이것도 유언으로 인정한다기보단 뭔가 특별한 상황의 계약으로 인정해주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계약은 민법 상 정교한 의미의 계약이 아니다.)
평생을 일군 재산이기에 그 금액도 만만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100원 빌려주고 못 받은 것에 대해서는 '에이 뭐 그냥 줘버리지.' 하기 쉽지만 억 단위로 왔다갔다 하는 재산을 대상으로 같은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민법에서는 왜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 것일까? 국가에게 국민의 재산권은 딱히 큰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유언을 가볍게 함으로써 반대로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 하겠지만 유언이 갖는 '특별한 상황의 계약', 이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유언이라 함은 법의 언어로 '당사자가 없는 일방 계약'이다. 민법 상 계약이라 함은 서로 다른 두 명이 의견을 조율하여 합의된 상태로 무언가 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A는 등기권, B는 현금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조율한 끝에 '등기권 = 2억'으로 합의하였고 B가 A에게 2억을 건네주는 대신 A는 B에게 등기를 이전하는 법률행위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면 합의에 의한 법률행위이므로 계약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계약은 합의가 전제가 되고 합의라 함은 반드시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유언만은 그렇지 못하다. 유언도 결국 재산을 이전시키는 법률행위임에도 상대방과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합의를 하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없는 일방적 행동이기에, 반대로 상대방은 반드시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할 필요도 없다. 나 없이 성립된 약속을 근거로 내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유언은 그 내용이 변질될 가능성이 너무 높은 행위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싶었지만 일방적 외침이었을 뿐이다. 평생 부모를 모셔온 장남은 다른 형제자매에게 재산을 나누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유언은 일방적인 계약이라고 한다. 장남은 이를 지키고 싶을까? 부모님의 유언이라며 장남이 모든 재산을 차지하였다. 자식들은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유언이 효력이 없어야 하는 단편적인 이유이다.
그렇기에 우리 법은 특별한 5가지의 유언의 방식만 인정하고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대신 자녀, 배우자에 대한 상속분을 법으로 정해놓았다.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선 균등하게 배분해 줄 테니, 그렇게 하기 싫으면 그대들이 증명하라는 방법으로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고 있다.
유증과 사인증여
이제 위의 사례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말한 유언의 방식으로 증여를 받게 되면 이를 줄여 유증(遺贈)이라 한다. 그렇기에 유증은 일방적 행위라는 것이 중요하다. 즉, 민법 상 계약이 아니다. 앞서 일방적 계약이라 표현하였지만 이해를 돕고자 쓴 표현일 뿐 민법 상 계약이 아니므로 당연히 상대방이 이를 이행해야 할 의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내용이다.
다만, 사인증여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죽음(死)을 원인(因)으로 하는 증여(贈與)이다. 결국 계약이 시작되는 원인이 사망일 뿐이지 증여계약에 의한 증여이므로 이는 민법 상 계약이다.
계약이냐 아니냐는 민법 안에서 여러 방향으로 의미를 가지는데 그 중 위 사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계약이므로 계약당사자가 사망하더라도 그 권리를 상속받은 사람이 기존의 계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상속은 '계약당사자'라는 지위도 상속을 시킨다. 위 사례의 경우는 父가 사망하고 형식을 갖추진 못했지만 그 유언에 따라 딸들에게도 법정상속분만큼의 재산을 나누어 준 상태니 유언의 효력과 별개로 상속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둘째는 유언이 효력이 없더라도 유언 당시 자신과 父만 있었고 父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줘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건 사인증여로도 볼 수 있지 않냐며 주장한다. 유언에 의한 상속이 아닌 계약에 의한 증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법에는 감정이 없다. 자식된 자의 도리 이전에 사인증여로 본다면 줄 건 주어야 한다. 그게 법이다.
민법은 생각보다 관대하다.
제1조(법원) 민사에 관하여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민법은 대원칙부터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법률에 없는 내용이면 관습대로 처리하라 하고 있으며, 권리의 행사는 절차와 형식보다 신의를 쫓으라 하고 있다. 父가 생전 마지막에 남긴 말은 유언도 되고 당사자 간 구두계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언은 지금까지 말했듯 보통의 경우 효력을 갖는 행동이 아니다. 그럼 절차 상 당사자 간 구두계약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계약으로 보고 사인증여를 인정해야 하는가? 법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언자인 망인이 자신의 상속인인 여러 명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내용의 유언을 하였으나 민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유언의 효력이 부정되는 경우 유언을 하는 자리에 동석하였던 일부 자녀와 사이에서만 ‘청약’과 ‘승낙’이 있다고 보아 사인증여로서의 효력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재산을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모두 배분하고자 하는 망인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고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나머지 상속인들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유언자인 망인과 일부 상속인인 원고 사이에서만 사인증여로서의 효력을 인정하여야 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그와 같은 효력을 인정하는 판단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망인이 유언하는 자리에 원고가 동석하여 동영상 촬영을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원고와 사이에서만 의사의 합치가 존재하게 되어 사인증여로서 효력이 인정된다면, 재산을 분배하고자 하는 망인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그 자리에 동석하지 않았던 피고들에게는 불리하고 원고만 유리해지는 결과가 된다.
증거로 제출된 동영상에 의하더라도 망인이 유언 내용을 읽다가 "그럼 됐나."라고 자문하였을 뿐이어서 원고에게 물었다고 보기 어려워 원고와 사이에서만 유독 청약과 승낙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울 뿐더러, 망인이 유언이 효력이 없게 되는 경우 다른 자녀들과 무관하게 원고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위 유언대로 재산을 분배해 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고 볼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단은 절차 상 사인증여로 볼 수는 있을지언정 고인의 마지막 말이 원고와의 개인 간 계약이었겠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유언이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 해서 유언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의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할 여지가 있고, 동영상을 통해 보더라도 이게 둘째에게만 주겠다는 말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민법에서 유언이라 함은 반드시 5가지 방식으로만 하게끔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민법 제1060조에 따라 유언으로 볼 수 없지만 같은 법 제562조에 따른 사인증여로도 보지 않겠으니 유언이 없다 생각하고 법정 상속분에 따라 배분하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판결 당시 이미 그에 따라 딸과 배우자에게도 배분되어 있으니 다시 나눌 필요 없이 둘째가 형제, 자매들에게 청구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하였다.
민법
제1060조(유언의 요식성) 유언은 본법의 정한 방식에 의하지 아니하면 효력이 생하지 아니한다.
제562조(사인증여) 증여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효력이 생길 증여에는 유증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
결국 유언은 아무리 형식을 갖추지 못해도 유언이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를 청약, 승낙에 따른 사인증여로 볼 수는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 유언이 효력을 갖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참고>
위 사례를 실제로 고등법원에서는 사인증여를 인정하고 소유권을 이전하라는 판결을 받은 상황에서 대법원에 상고한 사안이며, 고등법원이 잘못 판단하였다고 파기 환송한 사례이다. 둘째가 욕심을 부려 독차지한 것인지, 오히려 둘째가 재산을 다 받아도 모자랄 관계였을지는 그들만의 사정이다. 다만 법에는 감정이 없다. 단순히 볼 땐 '이게 어떻게 사인증여가 돼?'라며 생각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위 사례는 정말 대법원 판단 전까지는 사인증여가 된다고 보고 있었다. 법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판례로 보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려간 물건이 고장났으면 고쳐놔야지?! 그게 건물이라도 말이야. (0) | 2024.01.20 |
---|---|
사람을 때려도 무죄? 범죄라는 것은 생각보다 저지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정당행위 (2) | 2024.01.20 |
실질이냐 형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괄주의와 실질과세 (0) | 2024.01.18 |
반려견이 갑자기 손님을 물었는데 내가 한 거라고? 인과관계와 객관적 귀속 (0) | 2024.01.17 |
일상생활을 몰래 촬영한 것은 음란물인가? (0)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