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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로 보는 이야기

강제추행에서 '심신상실', '항거불능'의 의미

by KatioO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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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2023도2481(23. 4. 27.) - 형법 제299조(준강제추행)

A는 B와 처음 본 사이로, B가 취해 인사불성이 되자 집에 가기 위해 나왔고, B가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고 있어 이를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었기에 B의 친구 C와 함께 주변 모텔로 데려다 주었다. 모텔에서 A는 B가 자신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하던 중 서로 눈이 맞아 옷을 벗던 중 친구 C가 갑자기 들어와 급하게 다시 옷을 입고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B는 아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형법
제299조(준강간, 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297조의2 및 제298조의 예에 의한다.

 

해당 죄목은 앞에 '준'이 붙어있다. 즉, 강간이나 강제추행은 아니지만 그에 준한다는 뜻이다. 해당 조문 뒤쪽의 297조, 298조의 예에 의한다는 것은 '실제로 강간이나 강제추행은 아니지만 297조(강간), 297조(강제추행)이랑 똑같다고 보겠다.'는 의미이다. 그럼 '준'이 붙고, 안 붙고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강제력의 행사이다. 우리가 형법상 말하는 강간, 강제추행은 반드시 폭행, 협박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무력을 동반해서 피해자를 억압하여 강간, 추행을 하면 위 죄로 다스린다. 하지만 강간죄는 그 죄를 굉장히 엄하게 처벌(3년 이상 징역)하고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는 결과(고의면 무기징역 이상, 과실이면 10년 이상 징역)가 발생하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살인의 죄는 5년 이상의 징역이다.)보다도 엄하게 다스린다. 그렇기에 그 폭행, 협박에 대한 해석을 굉장히 좁게 해석하여 '반항이나 항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때'에만 이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강간의 죄는 꼭 폭행, 협박을 동반하지만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아니면 극단적으로 말해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이를 이용해 강간을 한다면 이는 폭행, 협박을 이용하지 않았으니 강간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것 또한 강간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여 이를 형법에 따로 '준-'이라는 접두어를 붙혀 준강간, 준강제추행의 죄를 묻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처벌 또한 조금 약한 것이 아닌 강간과 다를 바 없다고 하여 같은 수준으로 처벌하고 있다. 물론 위 사례는 강제추행이지 강간이 아니므로 이 정도까지의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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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아웃은 피해자의 주장일 뿐인데, 뇌를 열어볼 수도 없고 이를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대부분의 성범죄, 또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형법상 '심신상실'의 의미는 굉장히 모호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술로 인한 블랙아웃은 당시에 특별히 의사소통 등에 어려움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단지 다음날 일어나서 보니 그 때의 행동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피해자가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본인의 거짓된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반대로 이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현대과학으로 가능하기는 할까? 

 

거짓말 탐지기도 판례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경우가 1%라도 존재하기도 하며, 학자들끼리는 이를 증거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 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현대 과학으로도 사실상 저런 식의 '피해자가 주장하는 심신상실'에 대해 확인할 방법이 전무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범죄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을 기반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상대방이 많이 억울하다는 식의 글이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배드림 곰탕집 성추행 판결이다(대법원 2019도5797 판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법원도 정말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도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이런 사건이 더더욱 증거를 남기기 어렵기에 피해자의 진술,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더더욱 판결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이긴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원심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① 피해자는 원심 법정에서도 "본래 주량이 소주 한 병 가량이다. … 마지막 잔을 마신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고 같은 취지로 진술하였다.
② 친구C에 따르면 원심 법정에서 "B가 3차에 와서는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엎어졌다."고 진술하였다.
③ B는 잠에서 일어난 이후 C에게 물어서야 비로소 A와 함께 모텔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도 B, C의 진술에서 일치한다.
④ A는 C가 들어오려 하자 급하게 옷을 입고 나왔다고 하였으나, C의 진술에서 B는 조용히 누워 자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A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⑤ A와 B는 C와 함께 모텔로 가기 위해 20분 가량 택시를 함께 탄 것 뿐, 술을 함께 마시는 등의 친밀감을 형성할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 B가 A의 신체적 접촉에 동의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
피고인으로서는 피해자가 주취상태가 아닌 정상적인 상태 하에서라면 피고인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수동적으로나마 동의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피해자의 그와 같은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글을 읽던 사람들도 지금까지는 'A가 억울할 수도 있겠네.' 했지만 마지막 ⑤을 보고는 조금 의아했을 것이다. A와 B는 술집에서 헌팅 등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진짜 B와 C가 집을 가려는데 C가 인사불성이 된 B를 거두지를 못하고 있으니 A가 이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처음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A는 이 과정에서 서로 합의를 본 상황이다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①에서 ⑤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어찌됐든 피해자의 진술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법원은 ①, ③을 통해 피해자는 일관되게 진술을 하고 있고 ④, ⑤를 통해 A의 주장은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성범죄는 보통의 경우가 남, 녀의 싸움이 된다. 그리고 강간죄가 2012년 개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죄의 객체는 여성만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매체나 SNS에서는 피해자의 진술만이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법원은 그럴 수 없다.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는지도 중요하지만 피의자의 진술도 일관되고 상식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피의자가 살아남는 경우에 대해서는 크게 알리지 않는다. 매체의 관심 밖이기 때문이다.

구 형법(2012년 개정되기 전)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피의자의 진술도 일관되고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피의자가 여기에선 A가 처벌을 받게 되면, B의 일관된 진술이 바탕이 되어 나는 유죄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판례는 그 근거를 B의 주장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판례를 다시 살펴보자.

준강제추행죄에서 ‘심신상실’이란 정신기능의 장애로 인하여 성적 행위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능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항거불능’의 상태라 함은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으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를 의미한다.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술·약물 등에 의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 또는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유로 정상적인 판단능력과 대응·조절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면 준강제추행죄에서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해당한다. (2018도9781)

 

우선 모텔 입구 CCTV 확인 결과 B가 모텔 객실로 가기 전 혼자 보행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카운터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이 팔을 흔들거나 머리를 젖히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만 보아도 당시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A가 '피해자가 당시 의식상실 상태가 아니고 단지 기억을 못하는 것(블랙아웃)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다음과 같이 판시하고 있다.

법원은 피해자의 범행 당시 음주량과 음주 속도, 경과한 시간, 피해자의 평소 주량, 피해자가 평소 음주 후 기억장애를 경험하였는지 여부 등 피해자의 신체 및 의식 상태가 범행 당시 알코올 블랙아웃인지 아니면 패싱아웃 또는 행위통제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였는지를 구분할 수 있는 사정들과 더불어 CCTV나 목격자를 통하여 확인되는 당시 피해자의 상태, 언동, 피고인과의 평소 관계, 만나게 된 경위, 성적 접촉이 이루어진 장소와 방식, 그 계기와 정황, 피해자의 연령·경험 등 특성, 성에 대한 인식 정도, 심리적·정서적 상태, 피해자와 성적 관계를 맺게 된 경위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 내용의 합리성, 사건 이후 피고인과 피해자의 반응을 비롯한 제반 사정을 면밀하게 살펴 범행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2018도 9781)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블랙아웃의 상태였다면, 그 만남의 계기와 정황, 그리고 나아가 성관계까지 이어진 것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은 합리적이었는지까지도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위의 ④, ⑤를 이유로 들어 20분 만에 그런 합의를 도출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 A는 C가 들어와서 급하게 옷을 챙겨 입은 것이라고는 하나 C가 들어왔을 당시 B가 깨어있거나 하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A의 진술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 경위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취지로 A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성범죄 사건의 이면은 생각보다 복잡할 수 있다. 그 사건의 특성상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만이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피해자의 편을 드는 것만은 아니므로 종합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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